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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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4년 5월 20일에 치러졌다. 이 선거는 대한민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여당인 자유당이 후보자 공천제를 도입하고, 야당인 민주국민당도 공천제를 실시하여 정당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거 결과, 자유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국회를 장악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여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권위주의적 행태는 비판을 받았으며, 정당 정치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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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
---|---|
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이전 선거 |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선거일 | 1954년 5월 20일 |
다음 선거 |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선출 의석수 | 203석 (전체) |
과반 의석수 | 102석 |
투표율 | 91.14% ( 0.77%p) |
주요 정당 및 결과 | |
제1당 | 자유당 |
제1당 대표 | 이승만 |
제1당 득표율 | 36.79% |
제1당 이전 선거 결과 | 신생 정당 |
제1당 의석수 | 114석 |
제2당 | 민주국민당 |
제2당 대표 | 신익희 |
제2당 득표율 | 7.92% |
제2당 이전 선거 의석수 | 24석 |
제2당 의석수 | 15석 |
제3당 | 국민회 |
제3당 대표 | 이승만 |
제3당 득표율 | 2.56% |
제3당 이전 선거 의석수 | 14석 |
제3당 의석수 | 3석 |
제4당 | 한국국민당 |
제4당 대표 | 신익희 |
제4당 득표율 | 0.97% |
제4당 이전 선거 의석수 | 24석 |
제4당 의석수 | 3석 |
무소속 | 무소속 |
무소속 득표율 | 47.94% |
무소속 이전 선거 의석수 | 126석 |
무소속 의석수 | 68석 |
국회의장 | |
선거 전 국회의장 | 신익희 |
선거 전 국회의장 소속 정당 | 국민회 |
선거 후 국회의장 | 이기붕 |
선거 후 국회의장 소속 정당 | 자유당 |
2. 배경
대한민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여당인 자유당이 의원 후보자 공천제를 채택하였고,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도 후보를 공천하여 공천제 선거를 바탕으로 정당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6] 경쟁률은 의원정수 203인에 대하여 입후보자가 1,207명으로 평균 5.9 대 1이었다.[6] 제헌 국회 총선과 제2대 총선에서 보였던 정당·사회 단체의 난립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자유당·민주국민당 등 14개 정당이 선거에 참가하였다.[6]
이 중에서 10명 이상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가 4개였고, 1명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는 6개로 유명무실한 군소 정당 및 사회 단체가 대폭 정비되었다.[6] 정당·단체별 후보 상황을 보면 아직도 무소속이 797명이 출마하여 전체 입후보자의 66%를 차지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6] 정당으로는 자유당이 공천 후보자 181명, 비공천자 61명으로 모두 242명의 후보를 전 선거구에 공천하였다.[6]
정당·단체명 | 후보자 수 | 비율 |
---|---|---|
자유당 | 242 | 20.1 |
민주국민당 | 77 | 6.4 |
국민회 | 48 | 4.0 |
대한국민당 | 15 | 1.2 |
농민회 | 9 | 0.7 |
조선민주당 | 6 | 0.5 |
대한노동총연맹 | 5 | 0.4 |
민중자결단 | 2 | 0.2 |
제헌국회의원동지회 | 1 | 0.1 |
여자국민당 | 1 | 0.1 |
어민회 | 1 | 0.1 |
유도회 | 1 | 0.1 |
어민회 | 1 | 0.1 |
독립노농당 | 1 | 0.1 |
불교 | 1 | 0.1 |
무소속 | 797 | 66.0 |
합계 | 1,207 | 100 |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헌법의 삼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하였다.[6] 자유당은 3대 총선을 통해 개헌이 가능한 의석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2. 1. 정치적 배경
대한민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여당인 자유당이 의원 후보자 공천제를 채택하였고,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도 후보를 공천하여 공천제 선거를 바탕으로 정당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6] 경쟁률은 의원정수 203인에 대하여 입후보자가 1,207명으로 평균 5.9 대 1이었다.[6] 제헌 국회 총선과 제2대 총선에서 보였던 정당·사회 단체의 난립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자유당·민주국민당 등 14개 정당이 선거에 참가하였다.[6]이 중에서 10명 이상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가 4개였고, 1명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는 6개로 유명무실한 군소 정당 및 사회 단체가 대폭 정비되었다.[6] 정당·단체별 후보 상황을 보면 아직도 무소속이 797명이 출마하여 전체 입후보자의 66%를 차지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6] 정당으로는 자유당이 공천 후보자 181명, 비공천자 61명으로 모두 242명의 후보를 전 선거구에 공천하였다.[6]
정당·단체명 | 후보자 수 | 비율 |
---|---|---|
자유당 | 242 | 20.1 |
민주국민당 | 77 | 6.4 |
국민회 | 48 | 4.0 |
대한국민당 | 15 | 1.2 |
농민회 | 9 | 0.7 |
조선민주당 | 6 | 0.5 |
대한노동총연맹 | 5 | 0.4 |
민중자결단 | 2 | 0.2 |
제헌국회의원동지회 | 1 | 0.1 |
여자국민당 | 1 | 0.1 |
어민회 | 1 | 0.1 |
유도회 | 1 | 0.1 |
어민회 | 1 | 0.1 |
독립노농당 | 1 | 0.1 |
불교 | 1 | 0.1 |
무소속 | 797 | 66.0 |
합계 | 1,207 | 100 |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헌법의 삼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하였다.[6] 자유당은 3대 총선을 통해 개헌이 가능한 의석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2. 2. 정당 공천제 도입
대한민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여당인 자유당과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은 당 중앙에 의한 후보자 공천제를 도입하였다.[6] 이는 후보자와 당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후보자를 압축하여 당선 가능성을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경쟁률은 의원정수 203인에 대하여 입후보자가 1,207명으로 평균 5.9 대 1이었다.[6] 제헌 국회 총선과 제2대 총선에서 보였던 정당·사회 단체의 난립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자유당·민주국민당 등 14개 정당이 선거에 참가하였다.이 중에서 10명 이상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가 4개였고, 1명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는 6개로 유명무실한 군소 정당 및 사회 단체가 대폭 정비되었다. 정당·단체별 후보 상황을 보면 아직도 무소속이 797명이 출마하여 전체 입후보자의 66%를 차지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당으로는 자유당이 공천 후보자 181명, 비공천자 61명으로 모두 242명의 후보를 전 선거구에 공천하였다.
정당·단체명 | 후보자 수 | 비율 |
---|---|---|
자유당 | 242 | 20.1 |
민주국민당 | 77 | 6.4 |
국민회 | 48 | 4.0 |
대한국민당 | 15 | 1.2 |
농민회 | 9 | 0.7 |
조선민주당 | 6 | 0.5 |
대한노동총연맹 | 5 | 0.4 |
민중자결단 | 2 | 0.2 |
제헌국회의원동지회 | 1 | 0.1 |
여자국민당 | 1 | 0.1 |
어민회 | 1 | 0.1 |
유도회 | 1 | 0.1 |
어민회 | 1 | 0.1 |
독립노농당 | 1 | 0.1 |
불교 | 1 | 0.1 |
무소속 | 797 | 66.0 |
합계 | 1,207 | 100 |
3. 선거 과정
3. 1. 여당의 부정선거
자유당은 3선 금지 규정 철폐를 위한 헌법 개정을 위해 3분의 2 의석 확보를 목표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3] 막대한 선거 자금을 모아 유권자를 매수하고, 폭력배를 고용하여 야당의 연설회를 습격했으며, 야당 지지자들의 투표에 필요한 번호표를 배부하지 않았다.[4] 유령 투표, 대리 투표, 특정 후보(여당)를 위한 사전 묶음 투표 투입, 투표함 운반 도중 투표함과 투표용지 바꿔치기 등의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잇따랐고, 총선 후 제기된 당선무효 및 선거무효 소송은 25건에 달했다.[5] 뿐만 아니라 관헌의 선거 방해도 두드러졌는데, 자유당 후보가 낙선하면 경찰서장이나 사찰계장이 강등되는 반면, 당선되면 경찰 간부로 승진하거나 사찰 형사로 진급이 확약되는 등의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3. 2. 야당의 대응
4. 선거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자유당이 의원 정수의 56.2%에 해당하는 114명으로 원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이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점유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치구도가 자유당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무소속이 무려 67명이 당선되어 아직도 인물과 개인중심의 선거경향이 남아 있었으며,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15명의 당선자를 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밖에 당선자를 낸 정당·단체는 자유당을 포함해서 모두 5개였다.[7]
자유당이 국회를 장악하자 이후 장기 집권을 위한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 투표자수 : 7,698,390명
- 투표율 : 91.1%
당파 | 의석수 | 점유율 | 득표수 | 득표율 (%) |
---|---|---|---|---|
자유당 | 114[7] | 56.2 | 2,756,081 | 36.8 |
무소속 | 67 | 33.0 | 3,591,597 | 47.9 |
민주국민당 | 15 | 7.4 | 593,499 | 7.9 |
국민회 | 3 | 1.5 | 192,109 | 2.6 |
대한국민당 | 3 | 1.5 | 72,925 | 1.0 |
기타 | 1[8] | align="center" | | 286,097 | 3.8 |
합계 | 203 | 7,492,308 | ||
지역 | 총 의석 수 | 당선 의석 수 | ||||
---|---|---|---|---|---|---|
자유당 | 민주국민당 | 국민회 | 대한국민당 | 무소속 | ||
서울 | 16 | 5 | 3 | 0 | 2 | 6 |
경기 | 23 | 15 | 1 | 0 | 0 | 7 |
강원 | 12 | 8 | 0 | 1 | 0 | 3 |
충북 | 12 | 8 | 1 | 0 | 0 | 2 |
충남 | 19 | 17 | 0 | 0 | 0 | 2 |
전북 | 22 | 10 | 2 | 0 | 0 | 10 |
전남 | 30 | 15 | 3 | 0 | 0 | 12 |
경북 | 34 | 15 | 3 | 1 | 0 | 15 |
경남 | 32 | 17 | 3 | 1 | 0 | 11 |
제주 | 3 | 1 | 0 | 0 | 0 | 2 |
합계 | 203 | 111 | 16 | 3 | 2 | 70 |
4. 1. 정당별 의석 분포
자유당은 114석을 얻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며 제1당이 되었다.[7] 무소속은 67석,[7] 민주국민당은 15석을 얻는 데 그쳤다.[7]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은 각각 3석을 획득하였다.[7]당파 | 의석수 | 점유율 | 득표수 | 득표율 (%) |
---|---|---|---|---|
자유당 | 114[7] | 56.2 | 2,756,081 | 36.8 |
무소속 | 67 | 33.0 | 3,591,597 | 47.9 |
민주국민당 | 15 | 7.4 | 593,499 | 7.9 |
국민회 | 3 | 1.5 | 192,109 | 2.6 |
대한국민당 | 3 | 1.5 | 72,925 | 1.0 |
기타 | 1[8] | align="center" | | 286,097 | 3.8 |
합계 | 203 | 7,492,308 | ||
자유당이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점유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치구도가 자유당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반면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자유당은 국회 개원 시에는 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켜 133석을 확보하였다.[9]
4. 2. 지역별 결과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자유당이 우세한 결과를 보였다.[7] 서울에서는 자유당, 민주국민당, 무소속, 대한국민당이 의석을 나눠 가졌다. 경기도에서는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민주국민당과 무소속이 일부 의석을 차지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자유당이 우세한 결과를 보였다.지역 | 총 의석 수 | 당선 의석 수 | ||||
---|---|---|---|---|---|---|
자유당 | 민주국민당 | 국민회 | 대한국민당 | 무소속 | ||
서울 | 16 | 5 | 3 | 0 | 2 | 6 |
경기 | 23 | 15 | 1 | 0 | 0 | 7 |
강원 | 12 | 8 | 0 | 1 | 0 | 3 |
충북 | 12 | 8 | 1 | 0 | 0 | 2 |
충남 | 19 | 17 | 0 | 0 | 0 | 2 |
전북 | 22 | 10 | 2 | 0 | 0 | 10 |
전남 | 30 | 15 | 3 | 0 | 0 | 12 |
경북 | 34 | 15 | 3 | 1 | 0 | 15 |
경남 | 32 | 17 | 3 | 1 | 0 | 11 |
제주 | 3 | 1 | 0 | 0 | 0 | 2 |
합계 | 203 | 111 | 16 | 3 | 2 | 70 |
4. 3. 정당별 득표율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의 정당별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8]
당파 | 득표수 | 득표율 (%) |
---|---|---|
자유당 | 2,756,081 | 36.8 |
무소속 | 3,591,597 | 47.9 |
민주국민당 | 593,499 | 7.9 |
국민회 | 192,109 | 2.6 |
대한국민당 | 72,925 | 1.0 |
기타 | 286,097 | 3.8 |
합계 | 7,492,308 |
자유당은 36.8%의 득표율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며, 무소속 후보들은 4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아직 정당 중심의 선거가 자리잡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민주국민당은 7.9%의 득표율에 그쳐 야당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음을 보여주었다.[7]
자유당은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점유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치구도가 자유당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반면 민주국민당은 15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5. 선거 이후
5. 1. 자유당의 다수파 공작
5. 2. 사사오입 개헌
5. 3. 보궐선거
1954년부터 1956년 사이에 대한민국에서는 여러 차례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의석을 추가로 확보하였다.년도 | 날짜 | 선거구 | 당선자 | 당선 정당 | 공석 | 공석 정당 | 공석 사유 |
---|---|---|---|---|---|---|---|
1954 | 10.25 | 전라북도 진안군 | 박정근 | 자유당 | 이복성 | 자유당 | 사망 |
1955 | 12.27 | 경상남도 산청군 | 안준기 | 자유당 | 이병홍 | 무소속 | 사망 |
1956 | 8.23 | 경기도 광주군 | 신하균 | 민주당 | 신익희 | 민주당 | 사망 |
10.1 | 충청북도 영동군 | 손준현 | 자유당 | 최순주 | 자유당 | 사망 | |
11.5 | 경기도 고양군 | 이성주 | 자유당 | 한동석 | 자유당 | 사망 |
6. 평가 및 영향
6. 1. 부정선거와 권위주의 심화
6. 2. 정당 정치 발전의 계기
6. 3. 대한민국 정치사에 미친 영향
7. 당선자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001
[2]
문서
1952년 8월 대통령 선거 관련 정보
[3]
문서
부정선거 방법
[4]
문서
부정선거 방법 (사전 투표지 불법 취득)
[5]
서적
분단 후의 한국 정치 - 1945~1986 -
木鐸社
[6]
서적
大韓民國選擧史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64
[7]
서적
大韓民國選擧史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64
[8]
문서
제헌국회의원동지회 관련 정보
[9]
문서
1954년 선거 결과 관련 정보
[10]
뉴스
부득이 연기 현의원 임기 연장 않기로
http://newslibrary.n[...]
1954-02-20
[11]
뉴스
국회선 연기, 정부는 거부
http://newslibrary.n[...]
1954-04-02
[12]
뉴스
단상단하
http://newslibrary.n[...]
1954-04-22
[13]
웹사이트
중앙선관위 역대선거정보시스템
http://www.nec.go.kr[...]
20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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